[칼럼] NFBS 설립 30주년의 역사와 미래
![[칼럼] NFBS 설립 30주년의 역사와 미래](https://cosmobiz.com/media/magefan_blog/NFBS_30_years1.jpeg)
NFBS는 National Federation of Beauty Suppliers의 약자다. 한글로는 미주뷰티서플라이총연합회. 이전에는 NBSDA였다가 2013년에 개명하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NBSDA는 1990년 7월에 설립되었으니 2020년에 30주년을 맞았다. 아쉽게도 팬더믹이 발생하여 지난 1월 9일 뉴저지에 소재한 티넥 메리어트 호텔에서 3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한인 이민사회의 중추적인 경제단체의 30주년 행사라서 영사관, 뉴욕/뉴저지 지역 한인 단체장이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행사를 준비한 조원형 총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가 오늘 하는 일이 영원한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의 작은 선택과 노력이 앞으로의 변화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 결정이라 해도 훗날 큰 변화로 나타나므로 지금 이 순간의 결정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조원형 총회장의 말을 부풀려 상상한다면, 큰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금을 피벗 포인트(Pivot point)로 삼자는 간절한 호소처럼 들렸다.
새로운 메아리가 울려 퍼지려면 이전의 메아리가 지워지거나 사라져야 가능하다. 결국 이전의 메아리를 지우는 것은 방향의 변화를 의미하는 피벗이 필수적인 선택이어야 하고, 여럿이 힘을 합쳐 바퀴의 방향을 돌리자는 말이라서 그의 말을 부풀려 상상하는 거다.
I방향을 바꾸어야 하는지 혹은 바꿀 필요가 있는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30년의 협회 역사를 먼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NBSDA와 NFBS의 역사는 하단에 연대별로 정리해 놓았고, 그것을 시대별로 나누어 검토해 보면 케미컬 제품이 주류이던 시대가 있었고; 뒤를 이어 주류사회 진출 시대가 있었고; 헤어 제품이 중심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케미컬 주도의 시대
NBSDA는 1990년 7월에 설립되었다. 당시 케미컬 제품의 메이저 공급처였던 지니 뷰티에서 정식으로 딜러십을 얻어 뷰티서플라이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딜러십도 없이 제품을 돌려받아 뷰티서플라이를 우후죽순 여는 현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안은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음으로 단정 짖는 분석은 아니다)
거의 모든 산업에서 그렇듯 케미컬 제조사들은 판매되는 제품의 일정 부분, 예를 들어 전체 인보이스의 3%를 소매점 대상 마케팅과 교육 경비로 지출했다. 그중 일부를 제조사가 지불하고 일부는 도매회사가 메칭하는 게 일반적인 유통문화다. 그런데 그렇게 걷어드린 돈은 트레이드쇼와 카탈로그 인쇄하는데 다 써버리고 정작 소매점을 대표하는 협회에는 전달되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의 양심에 따라 정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걷어드린 돈의 10분의 1만이라도 소매점의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총연합회에 주어졌더라면 그때 만들어진 메아리가 지금쯤 음악처럼 아름답게 울려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돈을 쓴 케미컬 재조사 대표들의 불만도 컸다. 제품에 대한 교육이 왜 진행되지 않느냐는 불만부터, 디스플레이 도구나 제품의 판촉을 위해 돈이 제대로 쓰여지지 않는 사실에 대한 불만이었다. 도매업체 별로 경쟁하듯 트레이드쇼를 주최하고 제조사들이 참여하도록 압력행사를 하면서 반발이 커졌고, 지금은 한인들이 주최하는 트레이드쇼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만큼 거부감만 키웠다.
그런 사실을 당시 총연합회를 운영하던 분들은 모르고 있었을까? 몰랐을 것이라는 게 기자의 짐작이다. 도매업체가 사주는 밥과 술에 눈이 가려 제대로 상황을 볼 수 없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주류사회 진출 시대
초창기 총연합회는 특정 도매업체의 이익을 지키면서 자신들의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서 지금의 잣대로 그때의 총연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그 시절의 상황에 충실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테니까.
뷰티서플라이 제품이 컨비니언 스토어로 들어가고, 달러 스토어로 들어가 시장 질서가 무너진 다음에는 지역 상권의 의미가 줄어들었다. 특정 케미컬 도매업체의 얼굴마담 격이었던 총연합회의 기능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총연합회가 케미컬 제조사와 직접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두 번째 시대다.
1996년, 총연합회는 케미컬 제조사 모임이었던 Barber & Beauty Supply Institute (BBSI)와 자매결연을 하였다. 제조사들과 직접 대화 창구를 구축한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케미컬 도매업체가 회장단을 회유하거나 방해한 덕에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방해가 거세지면서 뷰티서플라이를 운영하는 회원들의 불만도 커지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이런 여론을 달래기 위해 케미컬 도매회사는 총연 임원들을 재조사로 초대해 견학시켜주고 좋은 호텔과 음식으로 향응을 제공하면서 여론을 잠재웠다. (이 또한 기자의 주관적인 견해로,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수 있음으로 단정적인 내용이 아님을 밝힌다.)
헤어제품 주도의 시대
케미컬 재조사들의 바램과는 동떨어진 트레이드쇼는 결국 서서히 사라져 갔고, 헤어제품이 뷰티서플라이 산업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시대로 변했다. 특정 소수가 독점적으로 운영되던 총연합회가 드디어 전국의 소매점 주인들 손에 넘어가는 개혁도 벌어졌다. 이상호 전 총회장의 통 큰 개혁 의지와 손지용 전 총회장의 강력한 통솔력이 합쳐지면서 뷰티서플라이 총연합회는 실질적으로 소매점을 대표하는 단체로 거듭난다.
트레이드쇼를 시작하고 (그 이전에도 1차 트레이드쇼가 열리긴 했지만 작은 규모였다) 소매점 경영인들에게 입과 귀를 제공해 드려야 한다는 취지로 코스모비즈도 출범시켰다. 먼저, 한국 정부 기관인 재외동포재단과 손을 잡고 한상대회를 획기적으로 키워냈다. 그때 만들어진 기반 덕에 지금까지도 한상대회의 가장 큰 영역을 뷰티서플라이가 쥐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 소재한 미 상무부 중소기업 진흥청과도 협력관계를 맺으려 했다. 아쉽게도 중간자 역할을 담당했던 몇몇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려 들면서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미정부기관으로까지 총연의 손을 뻗은 것은 사실이다. 이때가 2010년경이다.
헤어회사들도 손지용 총회장의 리더십을 따라주었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단, 아쉬운 점이 있다면 케미컬 제조사들과는 달리 헤어 회사들은 소매점 육성을 위한 기금을 내놓지 않아 총연합회가 트레이드쇼를 해서 수입을 창출해 내야 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거의 모든 산업에서는 제조회사(헤어 회사도 OEM 제조회사로 구분됨)가 출연하는 기금으로 협회가 운영되어 날로 발전을 거듭하는데 안타깝게도 뷰티서플라이 산업은 그런 기회를 단 한 번도 가져 보질 못한 거다.
정관에 따라 연임이 불가능했던 이유로 손지용 총회장이 회장직을 내려놓으면서 총연합회의 불도 식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지나간 역사라서 돌이킬 수는 없지만, 총연합회가 그때의 모멘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면 총연합회는 확연하게 다른 오늘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미래를 준비하는 인디 브랜드 시대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을 탓한다고 바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올바르게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해석은 날카롭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과거를 미화하거나 부끄러운 사실을 덮어두려 하다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바퀴를 돌려 더 어두운 미래로 내 달릴 수 있어서 냉철해야 한다.
뷰티서플라이 산업은 흑인 소비자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산업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절대 망할 수 없는 산업이라는 거다. 문제는 뷰티서플라이의 주인이 앞으로도 우리가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인력 공급을 계속해 낼 수 있는지; 급변하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맞추어 나갈 수 있는지; 4차산업혁명이 불러올 새로운 형태의 판매방식에 적응해 갈 수 있을 것인지; 체인약국 등으로 넘어가는 시장점유율을 지켜 낼 수 있을지; 인종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소비자와의 거리를 좁혀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공장이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는 상황을 대처해 낼 수 있을 것인지; 아침에 주문하면 점심에 받을 수 있는 월마트와 같은 배달 서비스를 어떻게 대적할 것인지; 이미 벌어진 도-소매업체 간의 신뢰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인지 등 수도 없이 많은 숙제를 풀어내야 미래의 뷰티서플라이 산업의 주인도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에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의심하기 전에 믿어줄 수 있어야 한다. 뭔가 잘못을 저지를 때까지는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도록 밀어주고 끌어주어야 한다. 한인 주도의 헤어 회사가 무너지면 한인 주도의 소매점도 무너질 것이라는 긴장의 끈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서로 상처 난 관계라 해도 상생을 위해 서로의 손을 꼭 잡아야 한다. 10가지 중에서 2가지가 서로 맞지 않았다고 맞는 8가지 좋은 점까지 버리는 바보스러운 고집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실속있게 엇갈린 2가지를 재외하고 맞는 8가지에 집중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면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무엇보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만 남발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작은 일 하나라도 실천해 나가는 자발적인 리딩 그룹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토양 위에 튼튼한 미래를 세울 수 있다.
최점균 전 이사장은 사석에서, “(총연합회가 제 기능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우선 활동할 수 있는 총연 운영자금을 자립적으로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쇼 방식의 전환도 생각해 보아야 하고, 회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이익을 드려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지역협회와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져야 총연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뷰티서플라이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는 뷰티서플라이 산업의 모든 종사자의 결정에 달려있다. 누가 대신 결정해 줄 수 없는 일이고, 공짜로 얻어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딱 한만큼만 발전해 갈 것이고 지켜낼 것이라서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 1990년 7월 미주 뷰티서플라이협회(NBSDA) 창립모임 (초대회장 김청생)
- 1992년 5월 LA 폭동 이후 대책 위원회 구성활동
- 1994년 5월 공동구매 추진 및 지역협회 활성화 방안 마련
- 1995년 2월 LA 지진피해 회원 성금 전달
- 1996년 7월 NBSDA와 BBSI 자매결연
- 1998년 5월 미주류 케미칼 업체와 공동구매 및 협력관계
- 2003년 10월 제1차 한상대회 참석
- 2005년 5월 제9대 이상호 회장 취임
- 2005년 9월 태풍 카트리나 피해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모금 활동
- 2007년 6월 제10대 손지용 회장 취임
- 2011년 6월 제12대 주부호 회장 취임
- 2013년 2월 NBSDA -> NFBS 영문명 변경
- 2013년 6월 제13대 유종현 회장 취임
- 2015년 6월 제14대 임종표 회장 취임
- 2017년 6월 제15대 강정상 회장 취임
- 2020년 1월 제16대 조원형 협회장, 회장 취임